대한민국에서 직장인 INTJ로 살아간다는 것은..
- 사회생활은 곧 INTJ들의 최고 시련과 고난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가 새로 머리를 하고 와도, 화장법을 바꿔도, 평상시에는 착용하지 않던 안경을 어느 날 갑자기 착용하고 출근해도 그가 무능하고 일적인 면에서 이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면 “와, 오늘 뭔가 다른데?”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사람 이름조차 외우지 못하는데 행동으로 이어진 상대의 사소한 기분변화까지 어떻게 알아차리겠는가. 이는 사람에 대한 관심의 차이로 주변에 존재하는 타 유형 ENFP에게 확인한 결과 ENFP들은 사람만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해서 말을 걸거나 아는 척을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고 하더라. 나는 그게 절망적으로 부족하다. 완벽한 최약체다. 여우랑은 살아도 곰이랑은 살지 못한다는 말은 직장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에게 어떠한 관심이 없다. 오히려 사람을 싫어하는 축에 속한다. 본인도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결과론적으로 자기애도 없다. 살아가는 내내 외부든 내부든 싫어하는 것들에 둘러쌓인 채이니 늘 스트레스받고 ‘죽겠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는 것이다.
- 사람을 무지성으로 좋아한다는 것이 꼭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분위기’라는 것은 존재한다.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지도 않고 가둘 마음도 없지만 대한민국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됐든 내 마음을 죽이고 또 죽이는 일의 연속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이 폭우처럼 쏟아져내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젖어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늘 괴롭다. 몸 안에 괴로움과 스트레스를 먹고 자라나는 무언가가 있는데 나는 꿈에도 모르는 것만 같다. 그것이 자라고 자라다가 기어코 터져버리면 나는 내가 과거에 두고 온 것들과 조우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 그 얼마나 허무하고 쓸쓸한 단어인가. 어쩌다 죽음을 곁에 두는 일을 하게 돼서 그것에 대해 많이 무던해진 것 같다. 지금은 단어가 주는 공포나 두려움 대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당장 얼마나 행복해야 하는지 에 대한 것들을 보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달의 뒷면처럼 보이지 않던 ‘죽음’의 너머를 내다보는 것이다.
-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는 것은 현직장의 장점이다. 깨닫고 알아가는 것은 INTJ의 유일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에 너무 많은 것들을 빼앗겼다. 꿈, 희망, 젊음, 건강. 직장이 내 삶을 야금 야금 갉아먹는다. 직장이라는 것은 돈을 벌고 내 삶을 영위할 수단일 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수단을 이용해서 나라는 존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나아가야 한다. 원하는 일을 하고 행복을 찾고, 다시 원하는 일을 위해 돈을 벌고 이런 사이클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대한민국의 직장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맨날 천날 오버타임에 노동법은 어겨지고, 굴려지고, 전화받으면 재깍재깍 오프인 날도 나가야 하고 싫어도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말도 안 되는 직장 상사의 괴소리를 들어주며 있는 대로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한다. 동시에 일하는 기계가 되어주면 좋다. 직장을 위해서 내 한 몸 갈아주면 수뇌부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 그러면서 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가져야 할 나만의 생활, 내가 원하고 하고 싶은 일, 새로운 도전들이 전부 뭉개지겠지만 직장 생활은 아주 행복하게 영위할 수 있다.
- 처음 그런 생활에 입문했을 때는 내 뼛가루를 직접 갈아 바다에 뿌리는 심정이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 늘 가슴 속에 사직서를 품고 다닌다. 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INTJ이고, 필요할 때마다 온갖 페르소나를 갖다 쓰며 본인의 약점인 인간들과의 관계와 사회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동물이지만 그게 스스로도 타격이 크다. 정신적인 타격은 사람을 사람이 아닌 존재로 만든다. 피폐해진 얼굴에서는 더 이상의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스스로도 궁금해지는 요즘, 직장에서 억울한 일들이 마구 생겼다.
- 안한 일도 한 일이 되고, 하지 않은 말도 한 말이 되어버리는 것이 굳이 나에게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이로써 생기는 억울한 감정이다. 억울함은 참으래야 참아줄 수가 없다. 말 섞고 싶지 않아 조용히 일만 하는 사람인 나도 그럴 때는 극대노라는 것을 하게 된다. 물론 이조차도 제대로 표출한 적이 없다. INTJ는 화가나면 되려 차갑게 식는 존재기 때문이다. 나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운 존재는 차분하기만 한 INTJ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고 더욱 언성을 높이는 것 같다. 빛조차 들지 않는 심해에 위치한 폭발하기 직전의 해저화산같은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행복이든 분노든 감정을 정의하고 표출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도 감정조차도 확인하고 들여다보려고 정의 내린 후 표출하려는 성향인 것을 말이다. 그래도 스스로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억울한 일조차 내 잘못은 없는지 분석하려고 하는 면이 있다. 이런 일이 생겨도 내가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고지식한 성격이다.
-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바꿔보려고 한 적도 있다.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을 따라하면 좋다길래 읽어보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좋은 인상을 주려면 자주 웃어야 하고, 상대방의 이름을 기억해주면 좋고... 등등 여러 말들이 있었다. 내겐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실제로 이게 정답일지언정,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인간관계론이 정확히 언제 쓰여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말도 있었던 것 같다. 요즘은 웃는 얼굴에 침 뱉는다. 물론 사람 본성과 심리에 따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로 살아가는 사람을 열심히 호응해주고 띄워주고 밀어주고 응원해주는 방법을 사용하면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려하게 흘러갈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데 아무런 이유가 없다. '싫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떤 사소한 이유든 모조리 갖다붙여 한 사람을 무작정 싫어하게 되면 그것을 되돌리는 데에 마냥 허허실실 웃어주는 방법만으로는 회복하기 어렵다. 단순히 싫은 게 아니라 혐오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웃는 얼굴에 침 뱉고 대놓고 면박주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하면 당한 사람보다 자신이 한수위라는 자신감이 생기는 모양이다. 사실은 타인을 감정 쓰레기통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본인이 멍청한 것인데 본인이 멍청한 것을 모르는 것도 멍청한 것 같다. 뼛속까지 INTJ인 나는 그런 사람들을 그냥 상종하지 않고 싶다. 나의 에너지는 사람을 상대하며 생기는 것이 아닐뿐더러 극소량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쏟고 싶다. 나를 어떤 이유로든 싫어하고 혐오하고 부정하는 사람들한테까지 쏟아부을 자신도 없고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내버려 두고 싶다. 질겅질겅 씹고 도마 위에서 마음껏 썰어라. 예수도 안티가 몇십억 명이다.
- 물론 그런 나도 힘에 부칠 때가 있다. 나의 행복을 지켜줄 시간만 조금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런 머저리들 속에서 나를 구원해주는 사람은 결국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나 자신이다. 그런 면에서 직장이 내 삶을 더 좀 먹기 전에 결단이 필요할 듯 싶다. 퇴사라던가 퇴사같은 것. 오늘도 나는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상황들 속에서도 미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